전라북도 부여는 백마강을 가지고 있는 도시인데, 이 도시는 전체가 유네스코 지역으로 지정되었는데, 부여는 문화재 중 하나인 부소산성은 백마강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며, 3천궁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낙화암이 있는 도시입니다. 여행 계획이 있다면 한 번쯤 부여를 방문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유네스코 지정 지역, 부여
독일 본에서 2015년 7월 4일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백제 역사 유적지구(총 8개의 유적지 중 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에 대하여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시켰다.
부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지정번호 1477번으로 Baekje Historic Areas의 한 지역에 속한다. 부여 도시 전체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존재하며, 문화재 하나하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가치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다. 첫 번째 문화재로는 부여 정림사지 및 오층석탑에 대하여 알아봤고, 두 번째 문화재로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그리고 의자왕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도록 한다.
백마강과 부소산성
부여 부소산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도성으로,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통일신라 시대부터는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인 부소산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사비 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던 곳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m2에 달하며,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부소산성은 백제 성왕 16년(538)에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면서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싼 태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면서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겹식 산성이다. 동,서,남문 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 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배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방어적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되며, 또한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도 역시 남아 있는데,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곳으로 보인다.
3천 궁녀 이야기, 낙화암
낙화암은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낙화암과 관련된 전설로는 많은 사람이 전래동화로 알고 있는 것처럼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 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현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실제로 부소산에 따라 낙화암이 있는 곳을 오르게 되면 백마강을 향해 삼천 궁녀가 뛰어들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낙화암은 삼천 궁녀가 다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좁아서 당시 궁궐터를 가지고 분석해 본 결과로는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3천 궁녀라는 언급은 실제 백제 시대에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가 흐른 뒤 한 참 후에 나오게 된다.
의자왕이 술과 음란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멸망했다는 점을 비판할 때 낙화암에서 투신한 3천 궁녀가 거론되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학민자의 최후를 역사의 필연성으로 기술했던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사비성 함락 직전 때는 군대를 보내 싸웠다고 하고 있으며,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비슷한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인데, "궁녀들이 왕포암에 올라 물로 뛰어들어 자살하여 타사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라고 쓰여 있다. 비록 3천명은 아니지만, 의자왕의 궁녀들이 타사암에서 물에 뛰어든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낙화암은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서 "여러 비빈" 이라고 표현한다. 조선 초의 문신 김흔(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 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를 대상으로 한 첫 언급이었다. 이후 윤승한의 소설 (1941년)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1962년)의 '낙화암' 항목에서 쓰이게 되었다.
낙화암에서 나오는 의자왕은(재위 : 641년 ~ 660년)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에 무왕이 죽자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있었다."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가게 되면서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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