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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백제의 문화재 역사_터만 남은 미륵사지의 이야기와 미륵사지 석탑

by 원역사지기 2022. 8. 10.

백제를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절대로 빠지면 안되는 문화재가 익산 미륵사지입니다. 익산 미륵사지는 현재 터만 남아 있지만 역사의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미륵사지에는 한국 석탑의 출발점이자 최대 석탑으로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이 있는데, 얼마 전에 복원을 끝내 일반에게 개방되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세계 문화 유산, 익산 미륵사지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로써, 가장 흥미로운 점은 2001년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이 시작되면서,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창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 역사 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륵사 역사 이야기                                                                                                                                            

미륵사는 무왕 때 지어졌던 백제의 가장 큰 사찰 중 하나로, 무왕이 지명법사를 만나려고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는 도중, 용화산의 밑에 있는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 무왕은 수레를 멈춘 후 경하를 하면서 큰절하였다. 왕비는 이 연못에 커다란 절을 세우기 소원하였고 무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무왕은 지명법사 찾아가서 연못을 메우는 방법을 물었고, 지명법사는 하룻밤 동안 산을 무너뜨리고 연못을 메워서 그곳을 평지로 만들었다. 그 후 이 평지에 미륵삼존을 모셨으며 불전, 회랑 그리고 탑을 각각의 세 곳에 세웠다. 그 후 이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기로 했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왕인 무왕 시절 가장 큰 사찰이나 현재처럼 터만 남게 된 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정조 시절 강후진의 와유록에서 탑은 백여 년 전 부서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륵사는 불타버린 것과는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없어지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절터는 경작지로 사용되었으며, 절의 돌들은 거의 주춧돌이나 민가의 담장으로 사용되었다가, 1910년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학자가 조사하였지만 잘못된 조사만 진행하였다. 그 후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가람의 성격과 구조뿐만 아니라 사찰의 정확한 규모를 밝혀내었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 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발굴을 한 결과 얻은 자료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1995년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여 약 2만여 점의 유물과 사지의 규모도 밝혀내었다.


한국 최대 석탑-미륵사지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은 목조 건물을 석재로 구현하여 백제의 목탑 모습을 잘 보여준 것으로,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며, 해체 당시 높이는 14.2m로,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는 한국 최대의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역사 : 미륵사지 석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 때인 639년이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 형식이라고 불리며, 여러 면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화강암을 사용한 이 석탑은 신라식 석탑의 상하기단과 달리, 사각형의 기단에 사방 3간(間)의 다층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서쪽 면 전체와 남쪽 면 대부분, 북쪽 면의 절반 정도가 무너지고 층수도 6층까지 밖에 남지 않아 2013년 보수를 시작하여 2019년 4월 30일 완료하였다.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일본 발굴 조사를 수행하던 중 1915년에 석탑의 일시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로 보수를 수행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잘못된 방법에 의하여 보수를 수행하여 추가 붕괴할 우려가 발생하게 되면서 국가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4월 해체 및 보수 정비를 결정하였다. 전라북도에서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간에 거쳐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 정비 준비를 시작으로 석탑 해체를 위한 가설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였다. 그 후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인 해체/보수 정비를 시작하였다. 국보임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체하고 창건 당시 건축 기술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 연구를 병행하면서 작업 일정이 늦어져 2017년 12월 원래 남아 있던 6층까지의 수리가 이루어졌고, 2018년 6월 수리를 완료해 7월 중순까지 임시 개방하였다가 최종 개방은 약 18년 가까이 수행한 결과 2019년 4월에 이루어졌다.
미륵사지 석탑의 발굴 : 2009년 1월 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하다가 심주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작은 병 금제 사리호, 금제 사리봉안기' 등 발견하였다. 금제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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