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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백제의 문화재 역사_부여와 다시 만들어진 정림사지

by 원역사지기 2022. 7. 27.

백제는 곡식 등 먹을 것이 풍부한 평아 지대에 만들어진 국가로써 부여에 도읍을 정하면서 백마강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불교문화를 제일 먼저 전파하게 되고, 그러면서 정림사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정림사지는 터만 남게 되지만, 다행히도 복원을 통하여 맑은 하늘 아래 정림사지를 만날 수 있게 되며, 그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볼 수 있습니다.

백제 문화 도시, 부여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오늘날에 이루게 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문화재가 전국 곳곳에 있다. 단순히 여행지에 의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알고 그 문화재의 중요성을 이해한 다음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며,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부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지정번호 1477번으로 Baekje Historic Areas의 한 지역에 속한다. 부여는 백마강이 흐르는 도시로 백제 시대에는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전파했으며, 그와 관련하여 문화재에 고스란히 담아져 있다. 따라서 부여에 남아있는 문화재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정림사지 복원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 백제의 주요 사찰로 현재는 사찰 터로 존재하지만, 정림사지에 우뚝 서 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발굴조사 당시 강당 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면서,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 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1983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1979~1980년, 1983~1984년에 걸쳐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정림사지의 윤곽을 확인하였다. 정림사지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일탑식 배치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석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져 있고,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 지어져 있다.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니라 특이하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회랑에 접속된 북/동/서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난다.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었다. 특히 1984년 발굴 당시 중문 앞의 연지 내부에서는 탄화된 연꽃의 줄기와 잎 등이 확인되었다. 정림사지 연지는 자연적으로 유입된 토사에 의해 매몰되었으며 백제패망 후 얼마 되지 않아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발굴 당시 드러나 중문 앞의 연못을 정비하였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정림사지 문화재                                                                                                                                                 

정림사지 오층석탑 : 화강암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8.33m이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였다.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개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오층석탑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돌을 끼웠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 기법의 기둥 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는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다. 탑 각부의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백제 석탑의 형식은 다소의 세부 변화는 있었으나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백제 석탑의 형식을 정비한 이 탑 이후 고려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5.62m로 고려 시대에 제작된 석조 여래 좌상이다. 백제 폐사지에 있는 비로자나불이며, 마멸이 심하여 조각된 의문선이 분명치 않다. 두부 이상은 언제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불상과 함께 발견된 와당에 있는 명문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백제 폐사지에 개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108호로 지정되었다.

석조불상 :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석조불상의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대ㆍ중대ㆍ하대로,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이는 불상보다 많이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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