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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신라의 과학 역사_별을 보는 신라 국보 문화재, 첨성대

by 원역사지기 2022. 8. 17.

신라는 삼국시대에 제일 먼저 만들어진 국가이면서 오래 시간 동안 국가로 유지하여 역사가 굉장히 길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그 오랜 기간동안 나라를 발전 시키기 위한 왕들의 노력 끝에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가 풍성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경주를 방문하게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게 되는 곳이 별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국보 문화재, 첨성대 입니다.

 

신라의 역사                                                                                                                                                         

삼국시대는 부족국가로 출범하였던 나라가 원시적 국가체제에서 벗어나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철제 농기구 사용에 의한 농경 생활을 확립시켰고,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한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이다. 그중에서 신라는 고대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며, 992년간 56명의 국왕을 거치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많은 문화재가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며, 그 문화재들의 역사 이야기 또한 굉장히 풍성하다.


국보 문화재,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중기 선덕여왕 시대 만들어진 석조 건축물로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 모형의 건물로, 경상북도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첨성대에서 창문으로는 반월성의 궁궐 전각이 바로 보이며, 첨성대를 중심으로 경주의 대릉원 내 고분과 미추왕릉, 주요 유적들이 존재한다.
첨성대 구조 : 첨성대는 높이는 9.4미터로,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존재한다.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 것으로 이 문에 사다리를 걸쳐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내부에 장대석이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존재한다.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바 하늘에 대한 천원지방설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는 해석도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가지고 있다.
첨성대 역할 : 첨성대는 우리나라의 과학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전통적으로의 기록에 따라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헀으리라 여겨져 왔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1904년 세키노 타다시와, 와다 유지, 1917년 루퍼스(Rufus,W.C.)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첨성대는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과 태양의 위치와 관계없이 일구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24절기를 포함하여 사계절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태양이 남중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을 떄를 춘/추분으로 측정하였으며, 동/하지는 창문 아래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때이다. 이처럼 신라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서,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을 바로잡기 위한 측경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 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첨성대의 이슈 : 한편으로는 1964년에는 해시계의 규표일 가설이 제시된 후, 정치적 조형물이라는 가설, 일종의 제단이었다는 가설 등 여러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첨성대는 건설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과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내용적인 면에서 정밀해졌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천문대의 기능을 했으리라는 주장도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제언들로 인해 현대에는 현대적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기보다도, 점성술 및 제의까지도 행해진 고대인들의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첨성대의 상태 : 2005년 언론에 의한 보도에 따르면 과거에 비하여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전후로 기울어짐이 심해졌으며, 당시 북쪽의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원인은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점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2016년 9월 경주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 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우려할 수준은 아닌 것으로 밝혔다.

참고자료_개성 첨성대 : 개성에 존재하는 고려의 옛 궁성터인 만월대 서문 밖에 있는 건축물로 고려 때 세운 것이다. 첨성대의 높이는 2.8m이고, 한 변의 길이는 2.6m이며, 기둥들은 정방형의 네 귀에 각각 세워지고 나머지 하나는 정방형 복판에 세워져 있되, 5개의 화강석 기둥 위에 돌마루를 깔았는데 매개 기둥은 어느 쪽이나 다 길이가 같고, 자름면이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돌마루는 돌기둥과 더불어 교묘하게 사개를 틀어 맞추어서 견고하고 단정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남북쪽 두 측면에는 쇠붙이를 끼우는 방법으로 돌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돌에 의해 사개를 교묘하게 짠 것이라든가 쇠붙이 이음을 적용한 것은 당시 구조물 축조 분야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윗면 서쪽에는 둥근 구멍 2개가 더 뚫어져 있는데, 이 구멍들이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쓰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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