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울의 지하철을 타게 되면, 동대문역, 남대문시장 등 단어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실제 이름은 조선의 도읍 한양으로 정하게 되면서 한양을 지키기 위하여 동서남북에 문을 만드는데, 문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조선의 남쪽에 있는 대문인 국보 1호 숭례문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의 도읍, 한양
우리나라는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시대에 이어서 고려 다음으로 만들어진 국가가 조선이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제1대 임금인 태조가 되면서 긴긴 역사를 이어 온 나라임을 뜻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도 역시 조선의 도읍을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과거 역사를 검토하면, 신라는 경주가 도읍 있었고, 백제는 부여가 도읍 있었는데, 도읍은 산과 강에 의하여 둘러싸인 것이 가장 중요하더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로부터 알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때 시간을 벌 수 있으며, 강이 있음으로써 다른 나라와 물물교환이 용이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도읍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만큼 더 중요 질 수밖에 없다. 태조 이성계는 과거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라든지, 고려 문종이 궁궐을 짖은 것들을 바탕으로 한강과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울은 한글 사전에서 찾아보게 되면 고유명사로 서울이라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보통명사로 수도 또는 도읍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서울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도읍이 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도읍이자 서울이기에 특별한 도시임은 분명하다.
한양의 남대문, 숭례문
조선의 도읍 있었던 서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중에서 서울의 남쪽에 만들어진 대문을 남대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숭례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1396년인 태조 5년에 최유경에 의하여 축성하게 된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숭례문의 편액은 태조의 아들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며, 2년 후인 1398년에 완공하게 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린 구조의 중층 건물이면서 전형적인 다포 형식의 건물이다.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이를 통해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1433년 세종 15년인 해에 7월경에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다듬은 다음 다시 짓기로 결정하고 나서 1447년 8월부터 숭례문을 다시 짓기 시작하였고 1448년 세종 30년인 해에 3월 17일 숭례문을 다시 완공한다. 그 이후에 1478년 성종 9년에 숭례문이 기울어진 것을 발견하고 수리를 결정하면서 1479년 4월 2일 숭례문을 수리하여 다시 완공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의 도읍이 서울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숭례문을 지키기 위하여 오랜 시간 동안 수리하면서 지켜왔으나 1907년 일본 역시 우리나라의 숭례문이 자신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데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자신의 나라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을 지나갈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되어 있던 성곽을 헐어버린다. 또한 헐어버린 성곽 자리에는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 전찻길을 만들었으며,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숭례문 앞에는 파출소를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숭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한다. 이렇게 숭례문은 일본에 의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1961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일부 파손되었고, 이 파손을 복구하고자 전면 해체 중수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62년 12월 20일 조선총독부의 문서 기준으로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하게 된다.
일본에 의하여 슬픈 역사를 가진 숭례문은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서 2006년 3월 3일에 일본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는 숭례문을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모두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개방하게 된다. 이 개방하였던 것이 화근이 된 나머지 2008년 2월 10일 추운 겨울 숭례문 안쪽에서 바람을 피하겠다면서 들어간 노숙인은 저녁 늦은 8시 40분쯤 몸을 녹이기 위하여 불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그 불이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숭례문은 불타기 시작하면서 약 5시간 만에 건물 일부만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면서 무너져 버렸다. 단순히 건물 하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600년의 조선의 도읍, 서울을 지켜온 역사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 있었다.
그와 더불어 숭례문의 화재로 인한 편액의 손실 막기 위하여 숭례문에서 편액을 분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엎치는데 덮치는 격으로 현판이 추락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그 충격으로 현판의 테두리 목이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면서 일부 결실이 되고, 일부 목재 편이 탈락하고 부분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 이 모든 조각들을 들고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긴급 이송시켜 다행히 보존 처리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후 문화재청에서는 무너져 버린 숭례문을 역사학자들과 함께 기록을 통해서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세운다. 지금까지 문화재청에 보관하고 있는 문헌과 자료들을 검토하고, 국립고궁박물관의 자료조사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포함하여 과학적 접근 방식(X레이 및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과거 숭례문에서 사용하였던 우리나라의 고유 소나무 등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인 오옥진과 단청장인 홍창원이 참여하면서 최대한 복원의 의미를 높여서 2009년 7월 3일 먼저 현판을 복원시킨 다음, 2013년 4월 29일 숭례문을 완공시켰고, 5일 후 5월 4일에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온 숭례문 복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완공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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