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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① 무관 이순신, 전라좌수사가 되다

by 원역사지기 2022. 12. 16.

이번시간에는 조선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서울의 광화문 광장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동상 바로 이순신에 대하여 여러 번 나누어 소개 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 시간으로, 무관 이순신이 녹둔도 사건에 의하여 첫번째 백의종군으로 있다가 전라좌수사가 되어 바다를 지키게 됩니다.

 

무관 이순신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서 1545년 4월 28일 한선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이순신은 총 어린 시절에는 건천동에서 살다가 소년기에는 외가인 아신에서 살게 된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다른 아이들과 모여서 놀 때에는 전쟁놀이하는 것을 좋아하여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서 놀았더라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던 친구인 류성룡이 이야기를 책으로 적음으로써 익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연루되어 문제가 생기면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아버지 이정도 늦은 나이가 되기 전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아 집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순신은 1565년 21살 되는 해에 보성군수를 지내 방진의 딸과 혼인하면서 그 당시 조선 중기는 남귀녀가혼이라고 하고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이 존재하는 시기라서 이순신은 처가에서 살면서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장인어른에게 병학을 배우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무과 시험을 준비한다. 방 씨 부인은 이순신의 무술 연습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패물을 팔아서 말을 사게 할 만큼 이순신에 대한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1572년 이순신은 28살이 되는 해에 훈련원 별과에 지원하였고, 아쉽게도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지고 만다.
그 후 4년 뒤인 1576년 이순신 나이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합격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에 나선다. 1580년 이순신이 36세에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 수군만호로 전근을 하게 된다. 발포리의 수구만호 재직 중 전라 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하여 군관을 시켜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게 했지만, 이순신은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개인의 사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서 나무를 벨 수 없도록 하자, 성박은 이순신을 밉게 보면서 후임인 이용한테도 부정적으로 평한다. 그러나 이용은 이순신과 생활하면서 이순신을 좋게 평하면서 이순신을 추천하여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다.

녹둔도 사건 그리고 백의종군                                                                                                                              

1587년 선조 20년에 조산보만호 이순신은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그해 가을, 이순신이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풍년이 들었던 녹둔도에서 추수하는 일을 돕게 되는데,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몰래 화살과 병기를 몰래 숨겨놓고 있다가 녹둔도를 기술 침입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서 조선인 160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15필의 말이 약탈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순신과 이경록은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이순신의 무예가 뛰어나서 그때 남아있던 수십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1,000여명이 넘는 여진족 기병을 상대로 오히려 반대로 방어에 성공하면서 무찔러서 그 결과 승리하면서 조선인 60명을 구하게 된다.
이때 녹둔도 사건이 발생하고 있을 때 북병사 있었던 이일은 도망쳤는데, 그 이후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자, 이순신에게 북방 여진족이 침략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 대한 책임을 덮어씌우게 된다. 이순신이 사전에 북병사 이일에게 혹시나 모를 여진족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병사들을 요청하였으나 이일은 이를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의한 피해만을 이용하여 이순신과 이경록을 해임하면서 감옥에서 투옥되게 한다. 그러면서 이일은 더욱더 악랄하게 임금인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모함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선조는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을 모함하고 있더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선조는 이경록과 이순신을 극형을 피하면서 처벌받는 방식으로 10월 16일 한 번의 실수로 극형에 처한다라는 과하다면서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조정에서도 백의종군하게 하여 입공자속할 기회를 주라고 정리한다. 선조의 지혜로 이순신은 백의종군으로 목숨을 겨우 구하게 된다. 그 뒤 1588년 2차 여진족의 녹둔도 침입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꾀어내어 잡음으로써 복직하게 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이순신은 복직하게 되면서 전라도감사 이광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로 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전라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워낙 이순신은 일을 잘하여 많은 백성으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믿음이 두터웠기 때문에 1590년 선조 23년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종3품 직책을 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여 보이자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승진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정리한 다음, 1591년 2월 47세인 이순신을 종4품 진도군수로 승진시킨다. 그러더니 선조는 이순신을 무조건 수사로 삼기 위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도 하기 전에 정3품 전라 좌수사로 전임시키고, 백의종군을 같이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 목사에 제수시킨다. 선조가 내리 결정에 많은 신하가 이순신은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였지만, 임금이 선조나 이순신은 전혀 흔들림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라도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라도의 부대별로 실태를 파악하여,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시키고, 거북선을 개발시킴으로써 군대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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