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시간에 국보 1호와 보물 1호에 대하여 배우면서 남대문인 숭례문과 동대문인 흥인지문에 대해서는 배우게 되지만, 한양의 서대문인 돈의문과 북대문인 숙정문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않습니다. 현재 아쉽게도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숙정문은 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문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양의 동대문, 흥인지문
태조 이성계는 1396년 태조 5년에 조선의 도읍이 한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양을 중심으로 특히 왕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을 만들도록 명하게 된다. 다른 성문들은 9월에 건립하기 시작하는 데 반해, 동쪽에 짓는 성문은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 채 땅을 다듬는 일부터가 급선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다른 성문들과 같이 2년 후인 1398년 태조 7년인 해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면서 흥인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 뒤 1451년 3월에 도성을 고쳐 쌓으면서 혜화문과 함께 수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1453년 단종 1년이 되는 해에 5월에 수리를 완료한다.
세월이 흘러 1868년 고종 5년 해에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수리를 들어가 이듬해인 1869년 3월에 고쳐 지으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조선 후기 건물 양식을 따르다 보니 지붕은 앞면에서 바라는 보는 시각에서 사다리꼴 모양을 가진 우진각 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4대 문 중에서 유일하게 성문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 풍수지리학에 의하여 '지'자 글자를 한 개 더 추가하면서 한양의 동쪽의 기가 약한 것에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흥인문에서 흥인지문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흥인지문은 이름을 4자로 바꾸어서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믿었지만, 1907년,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숭례문과 함께 조선의 대표하는 성문으로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에 의하여 일부 무너지게 된다. 숭례문과 동일하게 흥인지문의 좌·우측 성벽을 헐어 도로를 깔고 전차 선로를 만드는 데 사용되게 된다. 그 후 일본으로부터 나라가 독립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기록에 의하여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1호로 지정되어지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이 되면서도 지하철이 개통되고 지하수위가 낮아져 지반이 침하하면서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지반을 보강하여 복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2018년 3월 9일, 40대 남성이 흥인지문을 불태우기 위하여 일부러 몰래 누각에 침입하여 불을 붙였지만 다행히도 담장 일부만 그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처럼 흥인지문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있으면서 많은 풍파를 겪고 있다.
한양의 서대문, 돈의문
태조 이성계가 사는 집을 중심으로 서쪽에 대문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 1396년 다른 성문과 동일하게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며, 1398년에 완성시켰다고 하며, 이름은 풍수지리에 따라 돈의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1413년 태종 13년에 돈의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아서 지맥을 훼손하지 안 된다고 하여 돈의문을 사용하지 않고 서전문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1422년 세종 4년인 해 2월에 세종은 한양의 4대문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바르다고 판단하고 서전문을 막고 다시 돈의문을 열 것을 명하였고, 이때 풍수지리를 무시할 수 없으니 기존에 있던 돈의문과 서전문을 모두 철거한 다음 현재 신문로에 있는 언덕 위에 돈의문을 새로 완공하게 된다. 그러다가 1711년 숙종 37년에 문과 누각이 낡아서 다시 짓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도읍, 한양을 지키기 위하여 임금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5년,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던 우리나라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그건 바로 일본의 경성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기 위하여 일본은 흥인지문과 숭례문처럼 일부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돈의문 전체를 부수고, 그 위에 도로를 개설하였다. 돈의문의 목재는 경매로 넘어가고, 돈의문에 있던 귀중한 물건들은 조선총독부가 관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돈의문은 4대문 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009년도부터 서울은 돈의문을 복원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악재로 인하여 복원하는 것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2019년 8월 IT 기술에 의하여 증강현실로 복원을 먼저 완료시켰다.
한양의 북대문, 숙정문
다른 성문과 동일하게 1396년에 건립을 시작으로 1398년 완성하였으며, 북쪽을 지키는 대문이라고 하여 숙정문이라는 이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북쪽을 지키는 문이 있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다른 성문들처럼 도로변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성문들과 다르게 북쪽을 지키는 성문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문으로 북악산 산기슭에 있는 문이며, 풍수지리에 의하여 북쪽에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침범하여 아낙네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고 하여 아무도 가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성문 역할을 하지 못하여 1413년 폐쇄되었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고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홍지문을 만들어서 실질적인 북쪽의 성문을 대신하였다고 하며,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만 기우를 위해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가 1968년 북한 간첩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이 발생하면서 청와대 경비 목적으로 북안산 일대가 전면 통제되어서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게 되면서 실제 4대문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가 2006년 4월 1일 북악산 성곽 탐방로 구간을 일반에게 개방하면서 숙정문의 관람이 허용되면서 숙정문의 존재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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