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여행

조선의 과학 역사_최초 발명품, 측우기와 측우대

by 원역사지기 2022. 12. 11.

조선 초기부터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임금들의 노력이 빛을 밝히하면서 조선의 과학은 급격하게 발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세계 최초 발명품인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계인 측우기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측우기를 받쳤던 측우대는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세계 최초 발명품, 측우기                                                                                                                                    

조선 초기에 세종은 농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농업에 필요한 정보들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앞장섰으며, 그걸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농업에 필요한 물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데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를 세종은 이용하였다. 비 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인데, 각 지역마다 흙의 종류도 다르고, 각 지역별 날씨의 영향 탓에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다르다 보니 이에 대한 표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세종은 1441년인 세종 23년에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제작하라고 명한다. 그것이 바로 측우기이며, 처음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관측하는 일을 수행하였다가 1년 후인 1442년에 강우량을 측정에 하는 것에 관한 제도를 정하고 각 지방에서는 각 관가 뜰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측량, 기록한 다음 서운관에서 이 모든 지역의 측량과 기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 측우기는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는데, 길이 1척 5촌, 지름 7촌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을 써서 푼 단위까지 재었다. 그 후 쇠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식되는 것을 보고 구리, 자기 등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유럽의 기술보다 약 200년 앞선 것으로 세계 최초의 강우량을 재는 기계이면서 당대 조선의 과학기술력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이다.

대한민국 국보,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1441년 세종 23년에 만들어진 이후에 1442년부터 전 지역에서 설치하여 강우량을 측정하는 제도에 사용되고,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지면서 측우기는 배포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37년 현종 3년에 만들어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이 측우기는 세종 때에 처음 나들어진 측우기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이며,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3개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바닥 면의 명문을 보면 통인, 급창, 사령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공주 감염에 보관되어 있다가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눈에 띄면서 1915년 일본 기상청에 옮기게 된다. 다행히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고, 우리나라는 1971년 12월 21일 보물 제561호로 지정하였다가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그 이후 2020년 2월 27일 해지하고 측우기는 과학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의 구축과 이를 활용하여 농사짓는 데 도움을 주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2020년 2월 27일 국보 제329호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보물, 측우대                                                                                                                                         

세종이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였던 임금 있었기에 백성들이 일하는 농사 분야도 과학적으로 접근하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측우기를 개발하였고, 이를 제도화하였다. 지역적인 오차가 심한 측우 방식을 없앴고, 규격화되면서 표준화된 측우기를 다량으로 제작하여 서울 및 지방까지 보급하였으며, 기록하게 하였으나, 세종 때에 만들어진 다량의 측우기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 때 만들어진 측우기는 아쉽게도 단 한 점도 발견되지 못하였다. 다만, 측우기를 올렸던 대석만이 단, 몇 점 남아 있을 뿐인데, 그것이 바로 측우대이다. 첫 번째로, 관상감 측우대인데, 『세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강우량을 관찰하였다고 확인할 수 있으며, 측우대의 윗면에 직경 16.5cm, 깊이 4.7cm의 구멍이 파여 있어 측우기를 올려놓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측우대는 현재의 기상청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매동초등학교는 예전에 1934년 경복궁 구 대루원 금부지방 터였으며, 이는 공조 초에 경복궁 재건 후 북방 광화방 관상감으로 옮겨 놓았던 곳이라 하여, 이 측우대 이름은 조선시대의 관청인 관상감에 있던 측우대라고 하고,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3호로 지정되었다.
두 번째는 대구 감영의 선화당에 있던 측우대로 조선 영조 46년에 제작된 측우대로써 앞면 한 가운데에는 측우대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건륭경인오월조'라고 하여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가 확실한 측우대로 유일하다. 이 측우대는 1917년 조사 때 대구 감염 선화당 뜰에 측우기와 함께 있었던 것을 인천 관측소로 옮겨졌으나 측우기는 없어지고 대석만 남아 있다가 1950년 국립기상대로 옮겨졌으며, 한국전쟁 때 총격으로 몇 군데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2호로 지정되었다.
세 번째는 창덕궁 측우대는 1782년인 조선 정조 6년에 계속된 가뭄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측우대로써 창덕궁 금문원에 설치되었던 측우대이다. 그러나 1920년 경성박물관 앞으로 옮겨 전시되었다가 6.25전쟁 때 측우기는 없어지고 측우대만 남아있는 상태로 창경궁 명정전 뒤에 전시되었다가 지금은 서울 궁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4호로 지정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