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여행

신라의 문화재 역사_1400년 동안 지켜온 여왕의 사찰, 분황사

by 원역사지기 2022. 11. 4.

분황사의 이름에는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여왕의 사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400년 동안 법등을 밝힌 역사 있는 사찰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황사 절 안에는 문화재가 있는데 대표적인 문화재로 국보로 지정된 모전석탑이 있습니다.

 

1400년 역사 사찰, 절 분황사                                                                                                                               

분황사(芬皇寺)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사찰로써 현재는 다른 사찰에 비하여 작은 사찰이지만, 국보 문화재를 가지고 있으며, 선덕여왕 3년(634년)에 낙성된 이래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1,400년 동안 법등을 밝혀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한, 분황사는 황룡사와 더불어 신라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원효(617년~686년)와 고승인 자장(590년~658년) 등이 주석한 곳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송고승전에는 왕분사로 잘못 적혀 있어 별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분황사는 여러 문헌의 기록과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왕경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도시유적을 기반으로 드러난 유구와 다수의 유물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문화유적들이 주변에 분포되어 있어 황룡사지와 더불어 신라왕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시대 왕실 가람으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아 2019년 2월 26일 사적 제548호 지정되어 있다.


여왕의 사찰 : 분황사 역사                                                                                                                                   

《삼국유사》에는 갑오년에 처음 지었다 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년)에는 선덕여왕은 그 해에, 본인의 연호를 인평으로 바꾸고, 분황사가 완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두 기록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분황사는 634년이 절의 완공 시기이며, 그 전에 진평왕 말기에서 선덕여왕 즉위 사이의 기간 분황사의 창건이 시작되어 공사에 착수한 상태였을 것으로 해석되며, 선덕여왕 때 완성되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분황이라는 사찰의 이름은 '향기로운 임금' 즉 선덕여왕 본인을 가리키며, 《삼국유사》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왕의 사찰' 즉 여왕을 위한 사찰로 그 이름을 풀이하고 있다.


분황사 문화재                                                                                                                                                      

분황사 문화재로는 모전석탑, 분황사 보광전, 보광전 약사여래상, 삼룡변어정, 화쟁국사비부, 분황사터 당간지주가 있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 이후부터 많은 어려움 속에서 유지가 된다. 신라에서 고려 중기로 이어지는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많은 당우와 유물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침략,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모전석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아서 만들었는데, 본래 7층 또는 9층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래 3층만 남아 있다. 또한 분황사의 금당으로 쓰이는 보광전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그 위치는 창건 당시 분황사 중금당(가운데) 부지의 오른쪽 모퉁이에 해당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2008년 12월 11일부터 유적지 발굴 조사하여 그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중문 터를 확인하였다. 분황사 중문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전체 길이 12.63미터 규모로 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분황사는 전형적인 평지 가람 형식으로 석탑과 금당, 중문이 모두 남북 일직선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중문 터 양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회랑 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분황사는 2중 회랑을 가진 복랑 구조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한민국 국보, 분황사 모전석탑 :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화재로써, 안산암 즉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삼국시대 신라의 모전석탑이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분황사 창건 때인 신라 선덕여왕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 가지 기록에 따라 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7층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어서 현재 3층으로 되어 있으나, 191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이를 수리하고자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꺼냈는데, 함 안에는 고려시대의 중국주화 및 각종 옥류, 가위, 은 바늘 및 숭녕통보, 상평오수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인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아 올린 탑신은 널찍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 올린 모습으로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네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 있으며,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이 존재한다.
신라시대 돌우물, 분황사 석정 : 분황사 석정은 분황사 사찰 내에 존재하는 돌우물로써 호국룡변어정 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으로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석정은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 모양으로 바위틈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솟아오르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