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고구려/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며, 거의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에 56명의 국왕을 거치며 대한민국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에는 신라의 왕들을 모신 왕릉들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왕릉들은 경주에 모셔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신라 24대 왕, 진흥왕릉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국왕이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 구진과 법흥왕의 딸인 식도부인(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계기는 화랑도라는 국가적인 조직을 개편하여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외에 대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고, 553년에는 황룡사를 창건했다.
진흥왕릉은 선도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봉분 이외에는 전혀 다른 시설이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으로 사적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27대 왕,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은 김, 휘는 덕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나라의 일을 같이 보는 등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선덕여왕을 일찍이 눈여겨보곤 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라는 존호를 올렸다.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구휼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여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였으며, 재위 기간에 분황사와 영묘사 등의 사찰을 건립 및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선덕여왕릉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자 신라의 왕실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으로,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 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이후 679년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라 30대 왕, 문무대왕릉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김이고, 이름은 법민이다. 660년에 현지에서 신라 정예군을 총지휘하여 태종무열왕을 대신하여 백제를 정복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였다. 그 후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나당 전쟁에서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였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문무대왕릉은 문무대왕의 해중왕릉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수중 무덤으로 멀리서 보면 평범한 바위처럼 보인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자신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며,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한 것이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라 한다. 문무대왕의 아들인 신문대왕은 수로를 만들어 바다로 물이 통하게 하였다. 1967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35대 왕, 경덕왕릉
경덕왕은 신라의 제35대 왕으로 성은 김이고, 휘는 헌영이다. 아버지는 제33대 왕 성덕왕. 어머니는 이찬 순원의 딸 소덕왕후이며, 효성왕의 친동생이고, 왕비는 경수왕후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 대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하던 시기로,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불국사를 완공시켰으며,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또한, 제반 제도ㆍ관직을 당 제도로 개편하는 한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행정 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대개는 한자식으로 개혁하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경덕왕릉은 통일신라 경덕왕의 무덤이며, 구릉 경사면의 흙을 편평하게 깎아 축조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을 새김해 놓았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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