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여행

신라의 문화재 역사_신라의 국찰, 황룡사지의 문화재 이야기

by 원역사지기 2022. 11. 1.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 황룡사지는 신라 시대에는 국찰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찰로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화재인 황룡사지 9층 목탑이 존재합니다. 이 9층 목탑은 신라의 포부를 전달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치미와 청동나발은 황룡사가 얼마나 큰 국찰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문화재입니다.

 

황룡사지 역사                                                                                                                                                      

황룡사는 신라의 사찰로 진흥왕 14년(553년)에 경주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창건을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선덕여왕 12년(643년)에 황룡사 9층 목탑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경주에서 제일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그 터를 황룡사지라 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6호 지정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시대의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은 신라 3보 중 2개로써 황룡사에서 가지고 있을 만큼 굉장히 신라의 유명한 사찰임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의 국찰 : 황룡사지                                                                                                                                        

황룡사에 관한 내용들은 《삼국사기》에 다른 사찰보다도 많이 기록되어 있어 어느 사찰보다도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삼국사기》의 기록을 확인하면 각종 건축의 연혁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 결과 진흥왕 14년에 창건 이래 선덕여왕 때 완성 9층 탑까지의 기록 및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친행예불한 장소로 사용 되었더라는 기록을 통하여 약 90년 동안 굳건하게 신라의 국가적 대찰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 고종 25년(1238) 몽골의 난으로 말미암아 황룡사는 소실되었다. 남겨진 절터를 통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ㆍ탑ㆍ금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 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ㆍ탑ㆍ금당ㆍ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황룡사지 문화재 : 황룡사지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 율사가 당을 건너 갔다 와서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청을 올렸다. 선덕여왕은 군신들과 의논하였으며, 그중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전달하게 된다. 선덕여왕은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 200명을 이끌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탑을 완성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의 규모가 장대 무비 하였는데, 조영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로써,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ㆍ중화ㆍ오월ㆍ탁라ㆍ응유ㆍ말갈ㆍ단국ㆍ여적ㆍ예맥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으로 가지고자 9층 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통해서 이 탑에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과 포부를 반영하였다.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만이 남아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이 시점에, 2007년에는 이 목탑의 모습을 음각으로 디자인한 경주 타워가 완공되었고, 2016년도에는 이 목탑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중도 타워가 완공되어 많은 사람들이 황룡사 9층 목탑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현재 황룡사역사문화관에서는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한 전경을 볼 수 있다.

황룡사지 문화재 : 치미와 청동나발                                                                                                                     

1964년 12월에 9층 목탑 중앙의 심초석에서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이후 1976년 국가사업으로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1983년까지 약 8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금동불입상,금동 귀걸이,풍탁,유리 등 약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치미 :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지붕 장식으로써 연꽃무늬가 부착되어 있는 치미로 흙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건물 양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에서도 치미를 만들어서 지붕 위에 얹히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치마의 높이 182㎝로 치미의 크기를 통해서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청동나발 : 청동나발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은 조각에서부터 시작된다. 1982년 황룡사지에서 아주 작은 조각을 하나 출토하게 된다. 이를 청동나발편이라고 하며, 이는 부처님 머리의 머리카락 장식 아주 일부분 있었다. 부처님 머리는 신라 3보 중 하나인 장륙삼존불상의 부처님 머리로 청동나발편 조각을 통하여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삼존불상의 크기를 가늠하고자 복원을 시도하였고, 현재 황룡사역사박물관에서는 복원한 장륙삼존불상 부처님의 머리를 볼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