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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신라의 문화재 역사_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불국사 문화재와 석굴암

by 원역사지기 2022. 8. 23.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수학여행을 가게 된다면 우리는 많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여행지로 선택하였다. 그만큼 신라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로 불국사에서는 걸어가는 계단조차도 잘 보존되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석굴암은 세계에서 유일한 화강암 석굴로,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불국사의 문화재                                                                                                                                                 

연화교 및 칠보교 : 불국사에 있는 신라의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2호이다. 이 문화재는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며, 연화교가 아래쪽의 10단으로 구성된 계단이며, 칠보교는 위쪽의 8단으로 구성된 계단이다. 불국사의 또 다른 문화재인 청운교와 백운교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형태는 비슷하다. 연화교 계단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의 모양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누구나 무늬를 볼 수 있으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 부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청운교ㆍ백운교 : 불국사에 있는 신라 시대 신라의 건축물로 연화교 및 칠보교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국보 제23호이다. 이 문화재는 자하문을 통해 석가모니예래불이 계시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며, 청운교는 위쪽의 16단으로 구성된 계단이며, 백운교는 아래쪽의 18단으로 구성된 계단이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있는데, 이는 한국 홍예교,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통일신라의 금동 불상이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6호이다. 양감과 적절한 신체 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 :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66m의 이 불상은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의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7호이다.


대한민국 국보, 석굴암                                                                                                                                         

석굴암 :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로서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암을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라 대한민국 국보 제24호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석굴암의 구조 : 석굴암은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방형 전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며,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뒤에 위치한 광배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여러 차례 해체ㆍ조립ㆍ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 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약 3.4미터이면서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 위에 부좌하였고,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는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정확히 동해에 위치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
석굴암의 보수공사 : 석불암은 한참 동안 잊혔다가 1907년에 토함산을 지나던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12년부터 1915년까지 3년간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 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로, 천장이 새서 불상이 직접 비를 맞고, 전체의 반 이상이 돌과 흙에 파묻혀 있어 잡초와 넝쿨, 이끼가 덮여 있었다.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되자, 콘크리트를 사용하게 된다. 일본은 그 이후에도 석굴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실과 주실 전체를 시멘트로 1미터 이상 덮어버리고, 비도의 윗부분에도 시멘트를 이용해 석축옹벽을 쌓고, 진입로 역시 이전에 있던 좌우 돌담을 기준으로 시멘트 석축옹벽으로 개조를 하게 되면서 석굴암을 복원 불가능한 형태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 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 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구조로 일본인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로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1961년부터 1963년까지 2년간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덮었고, 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면서 습기 제거 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훼손하는 점이 발생하여, 1966년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하였고, 1970년부터 다시 앞 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로 설치해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인은 출입을 금지하고 있고, 매년 석가탄신일에만 석굴암 내부까지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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