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창덕궁의 두 번째 시간으로 임금들이 정치를 펼쳐던 곳으로 아주 중요한 창덕궁의 법전이자 정전인 인정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인정전과 인정문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부 변형되었지만 우리 나라의 주요 문화재 이기에 인정전은 국보로, 인정문은 보물로 인정 받았습니다.
인정전의 정문, 인정문
창덕궁의 인정전을 들어가기 위한 출입문으로써 1405년 태종 5년인 해에 창덕궁의 창건할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만들어졌다. 구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포계 팔각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상부에는 안초공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모습은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여러 참고 문헌 등을 통하여 1988년 복원한 것으로 여러 번의 소실 과정을 거쳤다. 처음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불타 소실되면서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다시 만들 때 세워졌는데, 1744년 영조 20년인 해에 인접하여 있던 승정원이 불에 타면서 연소하여 좌/우 행각과 함께 또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었다가 순조 3년 또 한 번의 화재로 인하여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될 때 지어지게 된다. 1910년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제에 의하여 주위 행랑과 함께 일부 변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임금 궁궐 문화재로 인정받아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13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인정이란 '어진 정치 뜻으로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이자 정전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 다음, 왼쪽에 있는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을 지나면 나타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소실되었다가 창덕궁이 먼저 복구되면서 경복궁의 근정전 대신 법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왕의 즉위식, 결혼식 등을 포함하여 세자책봉식, 문무백관의 하례식,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을 비롯한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창덕궁 인정전은 1405년 태종 5년이 되는 해에 만들어진 건물로,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지는 일을 여러 번 겪게 된다. 임진왜란에 의하여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1803년 순조 3년이 되는 해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었고 재건하였고, 1857년 철종 8년이 되는 해에 보수공사 이후 모습을 갖춘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인정전과 인정문을 포함하여 건물들 중에서 인정전은 그대로 남겨 놓고 주위에 있는 행랑들을 일본의 입맛에 맞게 가미하여 변형시켰다. 다행히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1988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시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인정전의 바로 앞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라고 하여 조정이라고 불리었으며, 정조 6년에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를 통하여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각각 18 품계를 새겼는데, 이는 위계와 권위를 상징하는 엄숙한 공간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당에 깔려있던 얇고 넓은 돌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철거되면서 잔디밭이 되었는데, 최근에 화강암을 다시 깔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 드라마를 통하여 인정전에서 행하게 되는 국가 행사인 왕의 즉위식 등 장면을 보게 되면 조정을 모습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이 중앙을 향해 서면서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반이라고 하였으며,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면서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고 하여 동반과 서반을 합쳐서 조선시대의 양반 계급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지 않고 문관은 무관을 바라보고, 무관은 문관을 바라보면서 임금님께 절을 하라는 '배'라는 구령이 떨어지면 문무관들은 홀을 든 채, 서로 마주 보면서 서 있는 채로 절을 하는데 이것을 '곡배'라고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인정전은 팔작지붕의 정면 5칸, 측면 4칸 건물인데, 밖에서 바라보면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천장이 높은 1층 건물이며, 정면에는 임금님의 용상 옥좌가 있고, 옥좌 위에는 보개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는 임금을 상징하고, 달은 왕비를 상징하는 일월오악도라는 병풍이 있다. 또한 일월오악도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의 다섯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전체 국토를 의미하며, 이는 임금이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 2007년에 발행된 대한민국의 만원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의 초상화와 함께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인정전이 임금의 공간을 분명하게 하였다.
인정전 내부의 바닥은 처음에는 진흙으로 구운 벽돌이 깔려 있었으나 1908년 무렵에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온 이후부터는 실내 바닥을 전돌에서 서양식 마루로 깔았으며, 전동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커튼 등 서양 장신구들이 설치되어지게 된다. 인정전 서쪽 행랑에서는 궁중 제사에 사용하였던 향과 축문을 담당하였던 향실과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 하던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삼청인 내삼청이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행랑에서는 인정전 마당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자주 사용되면서 과거를 담당하는 관광청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에 있는 행랑에는 악기고, 육선루, 서방색이 있으며 인정전 마당을 등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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