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서울 광화문을 지나가게 되면 바로 만나게 되는 건물입니다. 조선의 법궁이자 궁궐인 조선의 문화재 경복궁에 대한 역사이야기는 여러 번 나누어 이야기 하지고 합니다. 우선 첫번째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창건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리고 화재 사건, 그 화재 사건으로 인한 중건까지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의 창건
1395년 태조 4년인 해에 [시경]에 나오는 말을 빌려서 왕과 그 자손, 그리고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궁궐을 만들었으며, 3문(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3조(외조, 내조, 연조)의 건축 구조로 만들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은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이 있으며, 뒤로는 백악산이 둘러싸여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 지정되었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건립한 태조는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열어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임금이 살 궁궐을 짓게 한다. 궁궐을 짓기 위하여 터를 찾는 과정 중에 1395년 8월 약 인부 만오천명을 동원하여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우게 된다. 태조실록에는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며,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태조가 먼저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에 대한 이름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으며, 경복궁 및 근정전, 연생전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이 당시에 지어지게 된다.
경복궁은 1411년 태종 11년인 해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1426년 세종 8년인 해에는 세종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려라는 명을 내렸으며, 광화문, 흥례문, 일화문 등이 이때 지어졌으며, 1429년에는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 그리고 주요 전각을 새로 짓는 등을 통해서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경복궁의 화재
1553년 명종 8년이 되는 해 9월에 강녕전에 큰불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 불이 퍼지면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그 건물 안에 있던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서적 등 진귀한 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은 보전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1554년 봄에 약 3700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중건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1592년 선조 25년이 되는 해에 임진왜란 때 또다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게 된다. 불이 난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로 나뉘고 있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임금이 있는 조선의 궁궐이 불타면서 그 안에 있던 주요 물건들이 궐과 함께 모두 불타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명종 15년 때 건립한 경복궁을 그린 ‘한양 궁궐도’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이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금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게 되면서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후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게 된다.
경복궁의 중건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에 의하여 모두 소실된 이후에 조선시대의 법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이를 중건하거나 하지 않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지내고 있었다. 효명세자나 헌종 때 경복궁을 다시 중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왕실의 위신이 떨어지게 되면서 고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존엄성을 천하에 알리고, 중흥의 기세를 높이고자 1865년 4월 26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경복궁의 중건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고 행동으로 실행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영건도감을 두어 공사를 시작하게 하자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자 직접 그 총책임을 맡고 일을 그대로 추진하게 된다. 처음에는 백성들의 부역 보다는 관리와 일반 백성 및 종친들에게 원납전을 고루 바치게 하였는데, 자진하여 부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위해 위로금을 지급하거나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격려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에 사용할 나무가 필요할 경우에는 능의 산림에서 나무를 베어다 썼는데 1866년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건설하는데 작업 전체에 큰 지장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공사를 계속 추진시키기 위하여 건물에 사용할 강원도, 함경도의 나무들은 뗏목으로 운반하고, 각처에서 석재를 모아들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여기에서 하지 말아야 행동하게 된다. 자제가 부족하여지자 서낭당의 큰 돌이나 나무까지도 공출케 하였으며, 양반 집안의 묘지에서까지 목재를 마구 베어 오게 하였다. 더욱이 경비가 부족하게 되자 원납전을 받고 벼슬을 팔아넘겼으며, 서울의 성문을 출입하기 위해서 세금을 부과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올려 받는 등 무리하게 일을 강행하게 된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총 7년이 넘게 걸려 1872년 고종 9년인 해에 미술,건축 공예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경복궁이 완공된다. 그러나 나라의 경제적인 파탄을 초래하게 되면서 모든 백성이 원망하게 되고, 흥선대원군은 몰락하게 된다. 더불어 경복궁을 만들기 위하여 조정의 예산을 많이 사용하면서 병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군사력이 떨어지면서 우리가 겪지 말아야 할 일제 강점기를 겪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1895년 고종 32년에는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하여 시해당하게 된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써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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