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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문화재 역사_한국의 정원 상징인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어가다

by 원역사지기 2022. 12. 24.

[출처 : 서울관광재단 All rights reserved]

창덕궁은 후원을 가지고 있어 한국의 정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궁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임금들이 사랑하였던 궁궐이기에 여러 번 나누어 이야기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창덕궁에 대한 자세한 역사와 함께 대한민국이 보물인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에 대하여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정원, 창덕궁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서울특별시의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 자락에 1405년 태종 5년에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둔 상태에서 경복궁에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고,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며, 창경궁과 맞닿아 있으면서 동궐이라 불렸다. 6년 후에 1411년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그리고 1412년에 돈화문과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게 되는데,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의 생긴 모양에 맞추어 주변 구릉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도록 적절하게 궐의 기능에 맞게 지어져, 인위적으로 권위를 드러내거나 하지 않았지만,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또한, 현재까지 다른 궐에 비해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써, 조선 역사 500여 년 동안에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머물렀던 궁궐 있었다. 태조 이성계 때부터 조선의 정궁이 경복궁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들이 경복궁을 기피하고 창덕궁에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머무를 때가 많았으며,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게 되면서 소실된 이후 1605년 선조 38년부터 다시 건설 준비를 시작하여 다시 지어져 1610년 9월에 완료된 이후, 역대 왕들이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수행하여 임금이 거처하였고, 나를 다스리는 정궁 역할을 하였다.
또다시,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되어 1647년 인조 25년에 재건하게 되면서 인조는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그 이후에 정조가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여러 건물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할 수 있는 서고를 지었으며, 수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후원이 완성되면서 한국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면서 오늘날 한국의 정원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된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창덕궁에는 서양식의 전등과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는데, 돈화문 앞에 도로를 만들면서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지게 되었으며, 여러 건물들이 일본에 의하여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을 크게 훼손시켜놨다. 1912년에는 창덕궁의 후원과 낙선재 등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건물들을 훼손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그대로 방치되면서 창덕궁 주변으로 학교, 대형 건물, 민가들이 들어서게 되어 점점 망가졌으나, 1990년대 이후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어 1997년에 궁궐의 정원, 주변환경과의 조화 등 조선의 역사를 인정받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돈화문은 1412년 태종 12년에는 처음 세줘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서 소실된 이후 1607년 선조 40년에 재건하였다. 실제로 돈화문은 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서 궁궐 정면에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공간인 종묘가 있으며,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게 대문을 배치하는 원칙에 따라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으며, 궁궐임을 나타내는 표시의 정문이기에 화려하면서 크게 지어져 있는데 현재까지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돈화문은 이층집 구조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서 있으며,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고 문 좌우로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청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정오와 인정 때에 종을 울렸고, 파루 때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 안으로 들어서면 창덕궁의 첫 번째 마당이 나오고, 마당 서쪽으로는 금호문을 중심으로 행랑이 늘어서 있으며, 동쪽으로는 진선문과 행랑이 존재하였으며, 이는 궁궐의 첫 번째 마당에서 외부에서 들어올 때 처음 맞닿을 때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궁궐의 호위 임무를 맡은 장수와 군사가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창덕궁은 많이 훼손되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특히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도로를 만들려고 계획하였으나 순종이 조선의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훼손될 수 있다고 반대하여 건설되지 못하였는데,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바로 공사를 시작하여 1932년에 도로가 났으며, 돈화문 월대는 율곡로에 막혀버렸다. 그리고 수문장청이 있는 행락이 있는 곳은 돌담이 되어버렸으며, 창덕궁 앞으로 금천의 시냇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돈화문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1963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창덕궁의 돌다리, 금천교                                                                                                                                           

금천은 창덕궁 앞에 흐르는 시냇물로써,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이 금천과 같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현재는 금천교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금천교는 1411년 태종 1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동궐도 기준으로 본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옮겨진 상태로 존재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에서 도입된 자동차가 궁궐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문턱을 없애기 위하여 철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62호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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