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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 허난설헌

by 원역사지기 2022. 12. 22.

허난설헌, 허균 생가

조선 시대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여성 허난설헌은 항상 불행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본인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하였으나 다행히 허난설헌의 동생이 잘 간직하게 되면서 허난설헌의 작품들이 공개될 수 있었습니다. 

 

여성, 허난설헌                                                                                                                                                          

1563년 명종 18년에 강원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이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초당 허엽과 김광철의 딸 강릉 김씨 어머니에서 사이에서 딸로 태어난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으로는 옥혜이고, 호는 난설헌 또는 난설재이다. 자는 경번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아버지 허엽은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아들 1명, 딸 2명을 낳고 사별하면서 허난설헌의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아들 2명을 더 낳으면서 이복오빠 허성이 있으며, 친오빠 허봉,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허난설헌의 친동생이다. 허난설헌은 워낙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으며,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찍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초기부터 중기로, 중기에서 말기로 하면서 남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허난설헌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글을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난설헌은 어릴 때부터 오빠와 동생이 공부하고 있을 때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는데 워낙에 기억력이 좋고 글도 잘 읽으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신동 있었기에 8살이 되는 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이라는 글을 짓게 된다. 이런 모습을 본 아버지 허엽은 딸의 재주를 눈여겨보다가 귀하게 여기면서 직접 글을 가르치고 그림과 서예도 가르쳤다.
또한 여동생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오빠 허봉은 허균, 허성과 같이 시인 이달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허난설헌도 같이 글과 시를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허난설헌은 배움을 통해서 많은 시와 그림 등 뛰어난 작품들을 여러 남기게 되는데, 조선에서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허초희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 씨라고 불리게 되며, 조선 시대 기준으로 당시 여성 중에서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남게 된다.


불행한 인생, 허난설헌                                                                                                                                             

오늘날, 한국의 여성상을 대표하는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대한민국이 된 지금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보다는 남성 위주의 사회 문화이다 보니 정말로 여성이 뛰어남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으로 대표하는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쉽지 않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진출하기 시기가 지금까지 많이 짧기 때문이며, 여성에게 반드시 자식에 대한 어머니상을 함께 요구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사람이면서 선한 영향을 준 사람을 찾게 된다면, 누구나 조선 시대의 여성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며, 조선 시대의 여성을 대표한 인물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인정받는다면 허난설헌은 여성 본인 자체만으로 인정받는다. 그 이유는 동생 허균을 통해서 많은 글과 시가 책으로 남았으며, 그 글과 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한국의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른이 된 허난설헌은 뛰어난 재능과 글솜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굉장히 슬프다. 1577년 선조 10년이 되는 해에 허난설헌은 15살이 되면서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 김씨인 김성립과 혼인하게 된다. 남편인 김성립은 허난설헌의 뛰어난 글과 시 재주 땜에 멀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거기에 남편인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우리가 말하는 이른 바 승진하거나 하지 않고 종9품에 머무르면서 풍류를 지키는 것을 좋아하였고 바람기까지 있었다. 특히 시어머니와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허난설헌에게는 불행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1580년에는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였고,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을 병으로 연달아 잃게 된다. 그러면서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유산하게 된다. 거기에 친오빠 허봉은 율곡 이이를 비방하였다고 하여 귀양 가게 되고, 친동생인 허균마저도 귀양 가게 된다. 그러면서 불행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1589년 그녀의 나이 27살이 되는 해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도 3월 19일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게 된다. 허나설헌이 죽기 직전에 방 안에 있던 자기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으나 그녀의 시와 작품들은 다행히 친정집에 있었는데, 동생 허균이 누나의 시재를 아깝게 여기면서 이를 보관하다가 허균에 의하여 책으로 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허난설헌 작품                                                                                                                                                           

허난설헌의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우리가 잘 알고 국한문가사 규원가와 봉선화가가 있다. 허난설헌은 본인의 모든 작품을 태워버릴 것을 원하였지만 동생 허균은 누나의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160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이자 작품에 대하여 감탄하여 명나라 작가들에 의하여 비용을 지원하게 되어 시집 《난설헌집》을 출간하게 된다. 1711년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야지로가 허난설헌의 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 허난설헌 작품은 잊혔다가 1940년, 소설가 박종화가 허난설헌의 시와 작품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고, 2000년 9월에는 161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을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에 의하여 새롭게 발굴되어, 한중문화교류사 박현규 교수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시집을 정밀 분석하여 학계에 소개하면서 허난설헌의 작품들이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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