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이순신에 대한 두 번째 시간으로 전라좌수사된 이순신이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게 되어 일본과의 여러 해전을 겪으면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도 승리로 이끌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쉽게도 백의종군이 된 사연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1592년 선조 25년에 되는 해에 5월 1일 부산포에 늦어 오후 시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 함대 700척을 이끌고 침입하게 되면 임진왜란이 터지게 된다. 당시 전라좌수영 이순신에 부산에 침입한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는 시점인 5월 26일 밤 10시에 원균의 파발이 도착하면서 일본군의 침략을 알게 된다. 이순신은 바로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나머지 지역에 일본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으면서 병력 700여명을 비상 소집하여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에게 6월 8일까지 다 모일 것을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군 함대는 부산포에 상륙하자마자 빠르게 북진해오면서 이미 전라도 앞바다까지 도착하고 있었으며, 조정은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된다. 따라서 이순신은 6월 9일부터 바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해전,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을 거쳐, 부산포 해전까지 이끈다. 그 이후에 웅포 해전 이후 백의종군 하다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까지 총 7번을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일본과 전투, 1592년 해전
옥포 해전 : 1592년 6월 16일 옥포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옥포에 침략한 일본군 함대 26척을 모두 침몰시키면서, 잡혀있던 포로들까지 구하면서 이순신의 첫 승전을 하게 된 해전이다. 해전은 다음날 17일까지 이어졌으며, 아쉽게도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잡지는 못하였다.
사천 해전 :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는 데다가 6월 27일 김명원이 이끄는 군대의 임진강 방어가 뚫리면서 일본군이 황해도까지 빠르게 전진하게 되면서 7월 8일 이순신은 본인이 이끄는 군병력을 가지고 그동안 만들어놨던 거북선을 출전시켜서 노량진으로 향한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의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게 된다. 이틀 후 7월 10일에도 전투가 이어졌으며, 거북선의 우수한 지자총통 화력 덕분에 일본군을 계속하여 추격하면서 전투에서 승리해 나간다. 그 결과 일본을 개도로 협공할 수 있어서 7월 12일에는 전라우수영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한산도대첩 : 이순신의 군함대는 사천 해전 다음으로 앞으로 나가 8월 10일에 출발하면서 이틀 후인 12일에 드디어 노량진에 도착하게 된다. 일본군의 적선이 출몰하였더라는 첩보를 얻고 14일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때 이순신은 작전 명령을 내리고 조선군의 군함대는 후퇴하는 척 거짓으로 적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이른 바 육전에서 사용되었던 전술 형태인 학익진 형태의 진형을 갖춘 상태에서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일본군의 적선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을 상대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부산 해전 : 이순신의 군함대는 다시 정비하여 10월 초(음력 8월 말)에 부산으로 출정하게 된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게 되고, 음력 9월 1일부터 약 이틀간을 거쳐서 화준구미를 시작으로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까지 전진해 나가면서 일본군의 적선 큰 배 24척을 쳐부수게 되고 결국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게 되면서 일본군의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게 된다. 그 결과 일본군은 많은 배들이 부서지게 되면서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게 되고,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해전을 통해서 바다를 통한 해상권을 장악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순신 때문에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하게 된다.
백의종군, 이순신
웅포 해전 : 1593년으로 해가 넘어갔고, 이순신은 군함대를 데리고 2월 10일 웅포로 진격하게 된다. 일본군은 정면으로 전투하게 되면 또 패배할 것이라는 판단하게 되면서 조선군을 한 곳으로 깊숙이 유인하는 방식을 통해서 격파하고자 하였고, 이순신은 이를 유의하면서 공격을 하는 것으로 방법을 택하면서 싸움은 길어졌고, 그 결과 약 두 달여간의 웅포에서 전투가 계속 전개되었다.
그 이후로도 일본군과 계속 대치 상태로 길어진 데다가 육지에서 진행하고 있는 강화회담에서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일본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격을 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웅포 해전처럼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게 될 경우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공격을 함부로 하지 않고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순신은 선조를 포함한 조정들이 전쟁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여 1597년 4월 11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하게 하고 한성으로 압송되게 되면서 투옥하게 된다. 다행히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5월 16일 사형을 모면 받게 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하라는 명령받는다.
이순신은 명령을 받들어 권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권율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터라서 이순신은 권율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기 위하여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게 된다. 이순신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게 되었던 터라서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본가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의 어머니는 너무 힘든 나머지 아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배 위에서 별세하게 된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투옥 등으로 몸과 마음마저 모두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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