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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언어 역사_훈민정음을 만든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by 원역사지기 2022. 12. 8.

조선은 1대 태조부터 26대 고종 임금까지 총 26명의 임금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 중에서 조선 4대 왕인 세종은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던지 하였기에 오늘날의 한글인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면서 세종대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조선 4대 왕, 세종                                                                                                                                                 

조선은 신라 다음으로 약 600년 가까이 한반도를 다스려 온 왕조국가 있었기 때문에 1대 태조왕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 26대 고종까지 총 26대의 왕이 지위하면서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그중에서 조선 초기 왕들 중에서 4대 왕인 세종대왕이 즉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조선은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총 26명의 왕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더욱이 각 학교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동상이 바로 세종대왕 동상이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에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로 여섯 번째 아이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이다. 태종 8년(1408년)에 충녕군으로 봉해졌으며, 그 해에 소헌왕후 심 씨와 혼인한다. 세종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범생 스타일이라서 한시도 책을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아 과로로 인한 눈병과 건강을 해치게 되자, 아버지 태종은 책으로 감추기까지 한다. 4년 후 인 태종 12년(1412년)에 효령대군과 함께 충녕대군으로 대군으로 진봉 하게 된다.
그러다가 태종 18년(1418년)에 아버지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의 여러 가지 비행때문에 여러 신료들에 의한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여러 올라오게 되자 임금으로써 태종은 세자의 행동들이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하여 왕으로서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시키면서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그리고 몇 달 아버지 태종은 충녕대군에 양위를 하고자 하자 충녕대군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태종의 오랜 설득 끝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게 된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세자에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4대 국왕(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으로 즉위하게 된다. 세종은 사람들 중에서 유능한 인재라고 판단하게 되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바로 등용하였으며, 인사와 군사에 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깨끗하고 바른 정치를 펼쳐 나갔다.

 

훈민정음과 세종대왕                                                                                                                                           

세종은 정치를 하면서 특히 과학 기술, 문화, 예술,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워낙에 세종의 업적이 많고 뛰어나서 백성들의 존경에 대한 의미를 담아 '세종대왕'이라 불린다. 세종이 남긴 업적들이 너무 많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 모든 것을 나열할 수 없지만, 그중에서 조선을 발전시키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업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과학 기술에서는 지금으로서 뛰어난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내는 장영실, 최해산 등 학자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등용시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을 발명하게 하였으며, 국방에서는 김종서를 비롯하여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어 평안도와 함길도를 지키게 함으로써 4군 6진을 개척하였고,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까지 국경을 확장하여 사민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이 편하게 옮겨 살 수 있도록 하여 균형된 국가 발전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정치에서는 황희 등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내각 중심의 정치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하였고,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고, 전분6등법 등 공법을 통해서 조세 제도를 확립하였다. 아울러 문화면에서는 유교 문화가 발달시키면서 사대부에게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가 되도록 자리를 잡게 하였으며,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게 한다. 특히 책으로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출판시키면서 유교를 장려하는데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한글의 언문인 훈민정음을 만든다. 세종은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서 먹고 자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는데,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여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굉장히 마음 아파한 나머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쉽게 읽을 수 있는 효율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글자 체계를 만들 것을 관료들에게 지시하였고, 이를 통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다. 훈민정음은 입술의 소리가 나는 모양 등을 활용하여 만들었으며 모든 백성과 왕실이 사용하다가 20세기 주시경에 의하여 한글로 발전하게 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 쓰이게 된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 데다가 몸이 약하여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걱정을 많이 샀는 데다가 젊은 시절부터 임금으로써 백성을 위한 정책들을 워낙에 많이 펼치다 보니 무리한 나머지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건강이 몹시 악화하였다고 한다. 특히 세종은 자리에 앉아 많은 시간을 책을 보고 학문을 탐구하면서 별다른 움직임이 적었으며, 육식을 즐겨서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다가 종기와 당뇨병, 풍질 등 많은 질병을 얻게 되면서 각종 질병에 의하여 자주 시달리는데도 불구하고 병석에 누워 집무를 보다 보니, 세자 향(문종)이 대리청정하게 된다. 또한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으나 1446년(세종 26년)에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큰 충격을 받으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하였다가 1450년(세종 32년) 2월 17일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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