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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오만원 인물 신사임당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 이야기

by 원역사지기 2022. 12. 4.

조선시대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아 우리나라의 지폐들에는 그 인물들을 차용하고 있는데, 얼마 전 새로 생긴 오만원에 신사임당이 차용되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신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오만원 인물, 신사임당                                                                                                                                         

조선시대는 근대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6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문화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조선시대와 관련된 문화재는 굉장히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가기 위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서 소개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재미있기 때문에 매번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하여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많은 아이가 WHO라는 인물 소개 만화에서도 그리고 이영애라는 여자배우가 주인공을 한 드라마를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사임당과 이이 그리고 오죽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총 3편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가도록 하겠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라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특히 여성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다.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여성은 집에서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 아들들을 잘 키워서 사회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로 만들면서 어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집안의 살림을 맡아서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시댁의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모든 제사에 대해서 직접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여야 하였으며, 시댁 부모님을 모시면서 시중드는 일부터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여성에게는 결혼이 무덤이라고 할 만큼 결혼하게 되면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몫으로 할당되게 되면서 결혼 전에 자기가 만들어 명성과 실력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이라는 감옥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만큼 힘들고 어렵고 희생이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남성주의 문화에서 여성의 위상을 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화폐 발행이다. 우리나라의 종이 화폐는 천원, 오천원, 만원이 전부였다. 십만원은 수표이기 때문에 수표를 사용하기에는 큰 부담이 따르고 만원을 10장을 사용하기에는 불편함이 생기면서 5만원짜리 신규 화폐 발행의 필요성 생겨났고 그 결과 2009년 6월 24일 1973년 1만원 지폐 발행 이후 36년 만에 대한민국의 최고액권 화폐가 발행되었는데 거기에는 원화에 사용된 최초로 여성 모델인 신사인당이 차용되었다.

어린 시절, 신사임당                                                                                                                                            

한국의 어머니상에 대하여 누구겠느냐고 하였을 떄 대부분 많은 사람이 동일한 목소리로 신사인당을 선택하게 된다. 신사인당이 단순히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어머니로 선정되지 않았다. 신사인당은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발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적인 감각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며, 자식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조언자 역할을 하여 지금에서 우리가 말하는 워킹맘의 큰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 일 것이다.
신사임당은 1504년 12월 5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에서 외갓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라는 이름의 선비이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로, 아들이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인 집안에서 그 중의 둘째 딸로 태어난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우쳤으며, 기억력이 뛰어나서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는데 신사임당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아버지 신명화는 신사임당의 재능을 높이 보고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또한 신사임당은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에서 따와서 스스로 사임당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할 만큼 똑 부러진 면모를 가지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사임당의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그림 교재로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주면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된다. 7살 때에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산수화와 같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또한,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었으며, 기억력이 좋아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은 여성이 결혼하면 시댁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시댁에서 시댁 일을 도와야 하며, 죽어서도 시댁 귀신이 된다고 하여 호적에서 여자는 이름이 빠지는 문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친정에서 사는 문화가 남아있다. 사임당의 친정어머니는 출가 뒤에도 계속 친정 부모와 살면서 보통 결혼한 여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나 일가를 돌봐야 하는 분주함에서 벗어나서 비교적 소신이 있으면서 자유롭게 딸 5명의 교육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임당은 현명하고 냉철한 어머니 이씨를 통해서 어머니 모습을 본받았으며, 외할아버지를 통해서 예술과 학문을 배운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딸 5명을 키우면서도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도 정절을 지켰다고 하여 유교문화의 본보기 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지금의 문화와 다름이 없이 여성들이 재혼하는 일이 흔한 일이 있었는데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홀로 남아 딸 5명을 키워나갔다. 따라서 중종 23년인 1528년에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게 된다. 오죽헌이 있는 강릉에서는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 기념 각이 세워졌으며, 이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들은 사임당의 어머니 이 씨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임당이 죽은 뒤에도 어머니 이씨는 오래 살아 외손자인 율곡 이이의 지지자이자 방황하는 외손자를 다잡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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