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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문화재 역사 _정조가 만든 화성행궁의 공간들

by 원역사지기 2022. 12. 3.

수원 화성행궁은 정치, 경제 군사적 기능을 갖춘 계획도시로 수원에 화성을 거중기와 같이 다양한 기구를 사용하여 효과적이고 과학적으로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 개혁을 완성하려고 하는 정조가 머물 수 있는 곳으로 화성행궁을 완성하였으며, 공간들을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화성행궁 문                                                                                                                                                         

신풍루 : 정조 14년인 1790년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라고 하였으나 1795년 정조는 '신풍'이라는 이름이 일찍이 한 고사에서 '새로운 땅, 또 다른 고향'이라고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본인에게서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신풍루'라고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정조는 행차하였을 때 신풍루 앞에서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신풍루의 가운데 문은 어도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다. 현재는 신풍루 앞에서 무예 24기 보존회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 11시부터 30분 동안 무예 시범을 보인다.

좌익문 : 곁에서 돕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좌익문은 1790년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상문으로 3칸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을 가기 위한 두 번째 문으로 중앙문 앞에 있다.중앙문 : 1790년에 만들어진 문이자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 바로 앞을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으로 가운데의 정문과 좌우의 협문이 있고 좌우로 행각이 지키면서 출입을 통제하였다.

 

신하들을 머물 수 있는 공간                                                                                                                               

남군영 : 장용영(1793년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국왕 호위 군대) 외영의 친군위 200명이 살면서 지키는 건물이다. 신풍루에서는 마주 보는 쪽에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 남군영이라고 하며 정조 13년(1789년)에 처음 지어졌다가 1794년에 중축하였다.
북군영 : 남군영과 함께 장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 200명이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에서는 마주 보는 쪽에서 우측에 위치하고 있어 북군영이라고 하며, 남군영과 동일하게 정조 13년(1789년)에 처음 지어졌다가 1794년에 모든 62칸까지 늘려서 지금의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서리청 :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서리들이 사용하는 건물로 예전의 금도청 건물을 임시적으로 사용하다가 그 건물을 증축해서 사용하였으며, 1794년에는 수란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장청 : 비장청은 신풍루를 지나 왼쪽에 있는 건물이며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1789년 세웠으나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여 비장청으로 사용하였다.
집사청 : 집사청은 신풍루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며,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 안의 열쇠를 관리하고 여러 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를 포함하여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로써 비장청처럼 1789년 세웠다. 집사청 앞에는 수령이 6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어머니가 머물 수 있는 공간                                                                                                                                 

장락당 : 1794년 봉수당 남쪽에서 만들어졌으며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와서 만들어진 건물로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의 침전이다.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 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 만들었던 건물이기에 정조가 직접 장락당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봉수당 : 화성행궁의 본전으로써 1789년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홍 씨의 장수를 기원하고자 만들었으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라는 뜻을 담아 봉수당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1795년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정조가 직접 어머니 혜경궁 홍 씨와 함께 행차하여 봉수당에서 거행하였다. 진찬례는 조선 최대의 궁중 행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왕실의 많은 사람들이 행차부터 참여하였다. 정조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여 70수연을 지내기 위하여 봉수당에 사용한 물건들을 잘 보관할 수 있도록 직접 지시까지 내려 관리할 만큼 봉수당을 아꼈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파괴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1997년 복원되었다.

 

정조가 사용하였던 공간                                                                                                                                      

유여택 : 유여택은 정조 14년(1790년) 건립하면서 은약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 1796년 증축하면서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와 유여택이라는 이름을 바꿔 달았으며,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머물면서 신하들을 접견하였던 건물로 동쪽에 있는 건물이면서 공신루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룡관 : 1794년 2층 구조로 만들어진 건물인데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이라는 의미로 당 태종이 거처하였던 궁궐의 이름을 따와서 경룡관이라고 하였으며, 정락당의 바깥문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정조는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낙남헌 : 1794년 행사를 각종 행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물로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궐의 이름을 남궁이라고 한 것에 따와서 낙남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각종 행사를 치르는 건물이기에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연을 기념하고자 군사들의 회식을 여기서 진행하였으며, 특별 과거시험을 치르면서 무과 56명과 문과 5명을 선발하여 합격증을 내려주는 행사까지 진행하였다. 낙남헌은 특별하게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하여 행궁이 철거될 당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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