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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화가 신사임당과 오죽헌 이야기

by 원역사지기 2022. 12. 5.

신사임당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재능있는 인물이자 여성으로 소개되는 것은 그녀가 남긴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사임당은 워낙 그림을 잘 그렸던 여성으로 화가 신사임당으로 인정받았지만, 신사임당도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현재는 그녀가 살았던 검은 대나무로 유명한 오죽헌을 통해서 신사임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가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어릴 적 7살 때부터 워낙에 그림에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세종 시대의 화가인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림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 여러 지식인들 숙종, 송시열 등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을 보기 위하여 발문을 쓸 정도였다. 그래서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신사임당 자체만으로도 재능 있는 여성으로 유명하다.
신사임당의 그림 재능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로써, 2017년 1월 25일부터 5월 4일까지 방영한 SBS의 수목드라마인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정말 재미있게 나온다. 이야기는 시작은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 서지윤(이영애)이 우연히 발견한 사임당의 일기와 의문의 미인도을 찾게 되면서 그 속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다가 꿈속에서 과거로 빠지게 되면서 신사임당이 되어 천재 화가의 예술혼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그 속에서 신사임당의 그림과 관련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일화가 소개된다.
신사임당은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여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함부로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사임당은 여러 부인들과 다도를 나뉘고 있었는데, 마침 음식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 부인의 치맛자락에 음식을 부으면서 다 젖게 된다. 그 부인은 가난하여 잔칫집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옷을 빌려 입고 온 상태라 빌려 입은 옷이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안절부절 쩔쩔매면서 걱정이 태산 있었다. 그때 신사임당은 그 부인에게 자기에게 치마를 잠시 벗어주기를 권했고, 처음에는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찔한 방도가 없으니 신사임당이 하라는 대로 옷을 벗어주었다. 신사임당은 수습하기 위하여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얼룩져 묻어 있는 음식 자국이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기가 되기도 했다. 주위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림을 완성한 신사임당은 부인에게 치마를 가지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라고 시키고, 실수로 빌려온 옷을 버렸던 그 부인은 그림이 실물과 너무 똑같아서 치맛자락을 비싼 가격에 팔면서 빌련 준 귀부인 옷을 새로 구입하여 이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재주는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신사임당의 죽음                                                                                                                                                

신사임당은 집에서 살림하면서도 작품활동을 꾸준히 해 왔기 때문에 산수도, 초중도, 연로도, 자리도, 노안도, 요안조압도와 6폭 초서병풍 등이 대표작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뛰어난 그림 실력에도 불구하고 몸이 좋지 않아서 자주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씩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을 다하여 정성 들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가족들은 어린 이이의 모습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50년 가슴 통증을 앓다가 자리에 눕게 된다. 병은 심장병이었다. 1551년 여름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일찍이 임관한 장남 이선과 셋째 아들 이이와 함께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사임당은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원수는 장남 이선과 셋째 아들 이이와 함께 임무를 마치고 배편으로 한성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신사임당이 병상에 둘러앉은 다른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편지를 보낸 뒤 며칠 후에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2~3일 후에는 위독해졌다. 율곡 이이의 정성 어린 병간호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신사임당 그녀의 나이는 고작 48세 불과했다. 셋째 아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 때문에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사임당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탐욕의 상징으로, 황진이 등을 음란의 상징으로 비난하였다면, 비록 신사임당이 여성이라고 하지만 성리학 지식이 뛰어나며, 그림과 시 등 작품활동을 통하여 대표작들을 남김으로써 신사임당은 유교 문화에서 여러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자기 계발에 매진하였다. 또한, 자식들을 대학자,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에서 신사임당은 부덕과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존경받은 이유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 이이가 서인의 당수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국가적인 위인으로 격상되기도 하였다.

검은 대나무, 오죽헌                                                                                                                                            

1977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2006년에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앞면에 사용되고 있는 강릉에 있는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며 신사임당의 친정어머니의 집이기도 하다. 오죽헌은 처음에 조선 시대 문선 있었던 최치운이 지었고, 최응현의 고택으로 사용하였다가 훗날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이사온에게 자신의 저택을 물려주게 된다. 오죽헌은 조선 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보기 드물 문화재로써 주심포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지붕의 추녀는 너무 들리지 않고 원만하며, 기둥머리에는 창방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 하나로 장설과 주심 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평면 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칸이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죽헌은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인 권처균이 저택 뒤뜰에 검은 대나무인 오죽이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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