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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오천원 인물 율곡 이이의 탄생과 효심 이야기

by 원역사지기 2022. 12. 6.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신사임당이 율곡을 가졌을 때 흑룡 태몽을 꾸게 되며, 그 태몽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 역시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아 우리 나라 지폐 중 오천원에 차용되었는데, 신사임당에 대한 효심도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흑룡 : 율곡 이이 탄생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는 음력 1536년 12월 26일 아버지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난다. 신사임당은 처음 셋째 아들을 가졌을 때 태몽을 꾸게 되는데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이 방을 몽룡실이라 일렀고, 처음 이름을 '현룡'(見龍) 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율곡 이이는 현명하고 똑똑한 어머니인 신사임당 있었기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매우 총명하였으며 신동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에 있는 모든 분을 놀라게 하였으며, 3살이 되는 해에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4살이 될 때는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그 책에서 내용을 이해하고 설명할 줄 알아서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율곡 이이가 13살이 되는 해인 1548년에는 어른들도 따내기 힘들다고 잘 알고 있는, 말 그대로 현재 우리가 말하는 고시라고 할 수 있는 장원급제를 따내어 시험장에 있는 시험관들뿐만 아니라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도 놀랐으며 주위 사람들까지도 놀랐을 정도라고 한다. 그 뒤로도 장원급제를 여러 번 하게 되는데 총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율곡 이이는 워낙에 학문을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16살이 되는 해에는 더 이상 어떠한 스승도 더 잘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되자, 혼자 스스로 유교 경서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여러 책들까지도 통달하면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게 된다. 그의 업적은 성리학에서의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율곡 이이, 효심                                                                                                                                                  

율곡 이이의 부모님에 대한 효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책에서 많이 읽을 수 있으며, 그의 행동을 통해서 남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이 지극한데, 율곡 이이가 5살이 되는 해에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신사임당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사임당은 심장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율곡 이이는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서 매일 1시간씩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어느 날 5살 어린아이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이이를 찾기 위하여 뛰어다니다가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율곡 이이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11살이 되는 해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율곡 이이는 어린 나이에 불구하고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시 사당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또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 신사임당은 자주 병환으로 눕게 되었고, 율곡 이이와 형제들이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하였지만 1551년 끝내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기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는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외할머니 이 씨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율곡 이이는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잠시 승려 생활을 하게 된다. 1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가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1555년 20살이 되는 해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을 집필하게 된다.

오천원 인물 : 율곡 이이                                                                                                                                      

1582년(선조 15년)에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까지 임명받게 된다. 그러나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는 율곡 이이는 관직들을 모두 내려놓고 요양하게 된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음력 1584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장지는 어릴 때부터 생활하였던 본가인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자운산 선영에 묘소를 두게 된다. 증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당시 그의 부인 교하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하며 묘소를 지켰다고 한다.
율곡 이이는 여러 사람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래도 남긴 업적을 통하여 역사적인 인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1972년 7월 처음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종이 지폐 중 하나인 5천 원권 지폐 도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은행권 제조 기술이 부족한 터라서 영국에 위탁하였는데 영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초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율곡 이이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지폐 속의 초상화가 서양 사람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뒤로 율곡 이이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는 일이 생겼냐면서 1983년 6월 11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사용되던 대한민국의 5천원 은행권과 2007년 신권이 도입되면서 그려진 초상화가 상당히 다르게 그려지면서 1천 원권 지폐와 1만 원권 지폐와는 달리 동일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초상이 계속 변모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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