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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을미사변 100주년에 뮤지컬로 만나게 된 명성황후

by 원역사지기 2023.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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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로 극장에서 개봉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뮤지컬이라고 하면 해외에서 들어온 문화이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적인 뮤지컬로 탄생하여 역사를 알리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명성황후를 자세히 보고자 합니다.


최초의 한국 역사 뮤지컬, 명성황후                                                                                                                       

대한민국에서 뮤지컬이라고 한다면, 외국에서 비싼 라이선스를 지불하여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공연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옮기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과 노래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인 한글에 맞게 노래를 번역 및 편곡 등 많은 부분에서 수정 등을 거쳐서 공연을 준비하여야 하고, 배우들 또한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공부를 통하여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작품을 기획한 사람과 충분히 소통이 되어야만 공연에서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준비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던 중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95년 대한민국에서 뮤지컬 중 대한민국의 역사를 주제로 한 최초의 뮤지컬 공연이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하게 된다. 그건 바로 이문열의 소설 [여우 사냥]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명성황후 민 씨의 생애를 소재를 바탕으로 한 소설 원작 뮤지컬이자 국내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이다. 뮤지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하여도 명성황후는 누구나 학교의 역사 수업을 통해서 배웠다면 알 수 있는 주제이기에 광고를 통해서 뮤지컬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티켓을 예매하여 공연장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그해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며, 다음 해인 1996년 제2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연기상을 시작으로 의상상, 미술상, 연출상, 대상까지 받게 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 음악계의 거장인 김희갑, 양인자 부부가 작곡과 작사를 맡아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뮤지컬 음악 감독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뮤지컬 자체가 외국의 수입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대학이나 문화계에서는 뮤지컬 음악을 가르친 곳이 없었다. 마침 대학에서 악기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국악을 전공하면서 연극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우리에게 방송에서 음악으로 많은 감동을 주었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칼린 감독이 합류하게 되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로 뮤지컬 음악감독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리고 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해서 알려진 것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알려주는 스타강사인 설민석은 원래 대학 전공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있었는데, 명성황후 뮤지컬을 관람하고 나서 감동을 받아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을 거쳐서 이투스의 한국사 강의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살해, 을미사변                                                                                                                                      

명성황후 뮤지컬을 재미있게 보고 싶다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역사적인 배경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내용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며, 그 속에 있는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알아야 역사는 명성황후의 죽음이 발생한 을미사변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 랴오둥반도, 평후도 등에 대한 영토 분할, 배상금 획득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청과 일본의 조약을 맺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 조선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막음과 동시에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남부 서남 방향으로 튀어나온 곳이면서 당시 중요한 항구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던 랴오둥반도를 차지하게 된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고,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압박하였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하며, 일본은 이에 굴복하게 되면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에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삼국 간섭 이후에는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힘을 알게 되면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인 친러파가 등장하게 된다. 조선은 친러파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면서 적극적으로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으며, 그 결과 일본은 러시아와 친해지게 되자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큰 불만을 가지면서 일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방법을 찾던 중, 이를 움직이는 것은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친밀한 계획을 세운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군 한성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등이 조선인 군관들의 비호와 길 안내로 경복궁에 기습적으로 진입하여 건청궁 곤녕합 일대에서 궁내 복장으로 위장한 황후를 찾아내 칼로 찔러 암살한 뒤, 미우라의 지시로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에 던졌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하며, 다른 명칭으로는 명성황후 암살 사건 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 하며, 일본 작전명은 여우 사냥 이다. 처음에는 일본은 사건을 조작하였으나 2005년 당시 사건이 발생 후 두 두 달 뒤에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알게 된다.
을미사변 이후에는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 다시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을미개혁을 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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