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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대한제국의 인물 역사_뮤지컬 줄거리로 알게 된 의병 안중근 의사

by 원역사지기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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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웅]은 역사적인 배경인 을사늑약을 통해서 일본에 강제적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위해 독립운동을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뮤지컬의 줄거리를 통해서 안중근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뮤지컬 [영웅]의 줄거리                                                                                                                                           

이 이야기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루는 것으로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있기 8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는 단지동맹을 하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안중근의 손도장을 보게 되면, 마지막 손가락이 아주 짧은 것으로 아는데, 이는 머나먼 타향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과 동지들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씩을 자르면서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대신들은 조선을 수탈할 궁리를 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부터 만주까지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퍼져나가 일본 강대국을 만들기 위한 야심을 보이기 위해 만주 하얼빈으로 가기로 한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되는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궁녀 설희는 제국익문사의 수장인 김 내관에게 일본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고 뜻을 밝히자, 안중근을 포함한 제국익문사 요원들을 소개해주고,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와 일본의 야욕을 알리기 위하여 설희는 일본으로 안중근은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설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나미다라는 게이샤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매혹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설희에게 푹 빠지면서 그녀를 데리고 하얼빈에 함께 가기로 한다. 러시아에 도착한 안중근은 그의 오랜 친구 왕웨이를 만나게 되는데, 왕웨이는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에게 식당을 내어주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들의 집요한 추격 끝에 걸리게 되면서 왕웨이는 안중근과 동지들을 피신시킨 후 홀로 식당에 남아 일본군에 끌려가 심한 고문에 의하여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고, 안중근은 슬픔에 빠진다.
안중근은 설희로부터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하얼빈에 방문하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세 명의 동지와 함께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거사 준비한다. 혹시나 모를 작전이 잘못될 것을 고려하여 안중근과 유동하는 하얼빈 역으로, 그의 동지인 우덕순과 조도선은 이토가 잠깐 들리기로 한 책가구 역에서 가서 잠복하기로 하는데 일본군의 추격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 과정 중에 일본군의 총알이 안중근으로 향하였고, 안중근 대신 왕웨이 동생 링링이 총알을 맞았고, 안중근은 유동하에 시신을 맡기고 홀로 하얼빈 역으로 간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객차는 하얼빈으로 달리고 있었고, 객차 안에서 이토와 같이 설희는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로 이토를 찌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이토는 설희의 애국심에 감탄해 설희를 놓아주지만 이토를 처단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탄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결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특별객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오고 있을 때는 안중근은 경계를 철저히 지키는 일본군을 뒤로 하고 환영 인파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하얼빈역에 기차가 멈추고, 이토 히로부미가 내리는 순간 안중근은 총 3발을 명중시켜 그를 처단한다. 그리고 바로 체포된다. 안중근은 3명의 동지와 함께 공판 법정에 섰고, 안중근은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당당하게 밝혔지만, 일제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평화로우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염원하며 책을 집필하였고, 그곳에서 만난 간수 치바는 안중근의 고결하고 온화한 인품에 감동하여 그를 존경하게 되었는데, 안중근은 치바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의 붓글씨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라는 의미를 담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선물한다. 마침내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고, 치바는 안중근의 어머니가 손수 지어보네 온 수의를 들고 와 그에게 입혀주었고, 안중근은 의연하게 어머니의 격려하는 환영을 보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의병 활동,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은 원래 이름은 응칠있었다. 태어날 때 검은 점 7개가 등에 있었는데 이는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부터 응칠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향후 해외에 있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은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사냥을 좋아하고 놀러 다닌 것을 좋아하여 할아버지가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사용하여 중근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미곡상으로 대지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어릴 적 어렵지 않게 안중근은 보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여 상하이로 갔으나 잘되지 않아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로 1906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를 하여서 석탄 상회를 경영하였으나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운동을 시작한다. 그 뒤로 남포 돈의학교도 인수하여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1907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으로 퇴위 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독립 전쟁을 위해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게 된다. 그 뒤로 의병대를 찾아다니다가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듬해 1908년 7월 특파 독립대장 및 아령 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킨다. 그 뒤로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화를 결성하고 의병 활동 재기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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