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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조선의 인물 역사_뮤지컬을 통해서 만나는 역사,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by 원역사지기 2023. 1. 12.

명성황후 뮤지컬은 1995년 초연을 시작으로 2021년까지 총 25주년 기념 공연하게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명성황후 뮤지컬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나라의 역사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뮤지컬에서는 갑신정변, 갑오개혁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나라를 변화하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고종은 양복을 입고, 서양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주요한 역사 사건들을 함께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개화의 방법을 놓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두 세력으로 나누어서 각각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과 김윤식 등으로 구성된 파로써 조선의 제도와 사상은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반대로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면서 제도와 사상까지도 모두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청의 내정 간섭에 의하여 우리나라만의 독립적인 국가의 생각과 상관없이 청이 정치에 간섭이 심해지면서 개화 정책이 늦어졌으며, 급진 개화파는 불만이 점점 커지게 된다.
그래서 급진 개화파는 청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조선에서 일부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자, 일본의 힘을 이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일본의 도움을 약속받은 다음,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 업무를 관청 하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 떄 김옥균은 고종에게 청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말한 뒤, 궁궐을 장악하였으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14개의 개혁안을 발표하였는데, 청과의 사대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조세 제도를 개혁하며,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은 3일 만에 군대를 빠르게 도착시켜 이 갑신정변은 실패하게 되었으며,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사람들은 일본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으며, 청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간섭이 더욱더 심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은 조선을 상대로 갑신정변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면서 배상금을 요구하여 이를 받아 갔다고 한다. 갑신정변은 일본에 의지하여 급하게 정권을 장악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지만, 근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기에 향후 개혁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근대 국가 상징, 갑오개혁                                                                                                                                          

개항 이후 관리들이 부정부패가 점점 심해지고, 청과 일본의 경제 침탈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사회 개혁과 인간 평등을 주장하기 위하여 동학이 농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게 된다. 동학 농민군들은 전주성으로 점령하면서 전운소(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이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실어 나르는 곳)를 없애고, 탐관오리를 모두 쫓아내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농락하는 무리를 모두 쫓아낼 것이며, 백성을 잡역에 동원하는 일을 줄여 주라고 요구하는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때 정부가 청과 일본에 군대 요청하였고, 농민군은 청과 일본의 철수와 개혁 실시를 조건으로 정부에 휴전을 제안하였다.
따라서 1894년 조선은 전주 화약(농민군이 정부와 맺은 조약으로 전라도 지방의 개혁을 담당할 자치 기구인 집강소의 설치와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안 실시를 합의)을 맺은 이후에 조선 정부가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만든 기구인 교정청을 두고 조선 스스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국가 대신들이 국정을 집행하던 최고 기관인 내각을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하였다.
김홍집을 앞세운 내각에서는 군국기무처 즉 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을 설치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등 조선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총 2번의 개혁이 이루어지는데 제1차 개혁에서는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 과정에서 나왔던 개혁안들을 정부의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를 시작하게 된다. 1차 갑오개혁이 실시될 때는 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으로 조선에 대한 간섭이 서로 소홀하였기 때문에 진행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1차 갑오개혁은 대표적인 내용이 총 4가지인데, 첫째로, 지금까지 조선에서 수행하였던 과거제도를 폐지하면서 신분 제도도 같이 폐지하였으며, 두 번째는, 현재 대한민국의 기본이 되는 왕실과 정부의 업무를 분리하게 된다. 또한 지역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였던 길이, 부피, 무게 재는 도구인 도량형을 통일해서 물건을 사고팔 때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시장의 개념을 반영한 현실적인 개혁안 있었다. 또한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왔던 과부에 대하여 재가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2차 갑오개혁은 아쉽게도 일본에 의한 간섭이 생기게 된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유리하게 흘러가자 조선의 내각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기 위하여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으며, 김홍집으로 중심으로 세워진 내각에는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몸을 피하였던 박영효를 귀국시킴으로써 함께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 결과 1895년 1월 고종이 발표한 개혁안으로 조선은 청으로부터 독립하며, 왕실이 국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며, 신분제도와 과거제도를 폐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홍범 14조를 반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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